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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살리기

오후의 안부: 여긴 어떵옵디가? _한림3리장님 인터뷰







한림3리 이장님. 토박이 한말씀 들어볼쿠꽈?

림3리 이장님 참 좋다. 그리고 참 멋있다. 이장님 댁은 항상 열려있다. 아침에 새벽같이 해가 뜨기전에 밭에 나가셨다가 해가 지면 들어오신다. 죄송해요…죄송해요…매번 말하며 우리는 이장님 댁에서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한다. 씻고 나오면 사모님께서 육지에서 내려온 복숭아도 깍아주시고 포도도 주신다. 낼름낼름 먹으며 이장님과 사모님과 수다도 떤다. "우린 9시 뉴스 끝나기 전에 자야해. 왜 이렇게 씻으러 늦게와"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우리와 늦은 밤까지 담소를 나눠주시며 우리의 온갖 질문에 답도 해주신다. 어느 날은 밤마다 노느라 원고가 잔뜩 밀려서 씻자마자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왜 오늘은 벌써 가?" 하신다. 아 좋다. 이장님 좋다. 얼른 시집가라고 말씀해주시는 사모님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을사람들을 생각하시는, 그리고 마을을 생각하시는 이장님이 참 좋다. 한 공동체의 리더십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다. 이장님의 그 마음과 걱정이 좋다. 기꺼이 육지것들과(폐가살리기협동조합의 구성원은 대부분 육지사람들이다) 마을에 폐가를 살리시기로 마음먹으신 한림 토박이신 이장님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 여름인데 이장님은 휴가 안가셔요? 

안가. 농사짓는 사람들은 그런거 안가지. 빨간날에 대한 개념이 우린 없어. 비오는 날은 하우스 해야지. 우리는 365일 일한다. 농사를 열심히 짓는 사람들은 366일 일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난 그 반도 못한다..이장하고 난다음부터는.. 


- 언제부터 여기서 사셨어요?

난 태어난게 한림이야. 그리고 한림3리는 6살말 7살. 그때 왔지.


- 그때는 사람들이 얼마나 살았나요?

초등학교때 90가구. 평균4명잡으면 360명 정도 마을에 살았지. 보통 평균 4명 이상이니까. 우리집만 해도 7명. 아부지 어머니와 오남매. 원래 여기 주차장, 그리고 텃밭, 여기 다 주택지였어. 그니까 지금 공터보이는데는 다 집터 였다고 보면 되. 한림3리도 작은 마을은 아니었는데. 육지갔다가 내려와서 보니까, 가장 적은 마을이 되었더라. 얼마나 적은지 각 마을 홈피 가서 봤는데 우리 마을이 제일 작더라. 원래 그렇게 작은 마을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 옛날에도 이 집에서 사셨어요?

처음에는 이 집에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사셨고. 우린 이 근처에 살았지. 바로 요 앞에.


- 이장님께는 이 마을이 어떤 곳이예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인가요?

뭐 그냥. 여기 남을려고 해서 남은것은 아니야. 그렇다고 특별히 이동할 이유도 없고. 어쨋거나, 그런 특별한 건 없어. 농촌에는 도시처럼 자주 옮기고 그러지 않아. 육지는 직장, 집값 따라서 이동을 하는데, 시골에는 한번 정주를 하면 무던해 갈때까지 살지. 그게 거의 시골 정서인것 같아. (이사를 간다해도) 지금 상황에 가고 싶은 뭐가 없어. 어딜 옮겨서 가거나 그럴 이유가 없지. 귀농 귀촌 하는 사람이 그걸 못하는 것 같애. 3년 이상을 버티면 좀 버티던데. 3년을 버티며 살아야하는데 정서 안맞는것 같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거나, 문화혜택을 누리는 부분이라던가. 그런게 잘 안맞는 것 같다. 


- 혹시 다른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하셨어요? 그렇다면 이유는 뭐고 안그렇다해도 이유는 뭔가요? 

정서가 같으니 이동할 필요가 없어. 인원도 없고 서로가 다 바빠. 처음 농사 시작할때만해도 수눌음. 품앗이. 이런 것들을 하면서 같이 힘든 줄 모르고 농사를 지었는데, 이젠 어른들 밖에 없어서 더 할 수가 없어졌어. 자기네 일하기도 바빠. 사람이 없다. 어른들도 힘드니까 품앗이를 안해.


- 마을분들이 모두 친밀하신거 같아요, 마을 공동체로 제주는 모여 사는데, 한림3리는 어떤가요?

마을은 전전 이장때 둘로 쪼개졌었어. 그게 대충 봉합되기는 했는데 수놀음 된는게 그 때부터 잘안됬지. 근데 어쨋든 지금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촌에 계라는게 많은데, 그릇계, 화단계(장 났을 때 상여를 관리한는 계모임), 갑모임, 등등 그런 공동체가 조직이 되었었는데 지금은 촌에 어디든 모임이 별로 없어. 젊은 사람들은 농사규모가 대농이고 할망들은 손바닥만하고.. 하니까 공동체 적으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영농조합, 협동조합으로 하는 곳이 그나마 공동체가 유지되고, 우리 공동체는 그런걸 할만할 젊은 인재가 없어. 예전엔 우리 마을에 쪽파 나가는게 2.5톤씩 나갔는데, 차츰 다 돌아가시고 지금 남아있는 분들도 이제 힘드시니까 안하신다.. 그러니... (한숨)


- 처음에 육지에서 내려온 청년들이 한림3리에 들어와서 집을 고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떠셨어요?

영민이가(제주폐가살리기 조합장) 성환 사무처장 통해 찾아왔었어. 긴가민가 긴가민가 했는데, 귤 밭에까지 찾아왔더라고. '이장님 밥 좀 주십쇼' 하며 와서 같이 밥 먹으멍.. 올 봄에 스타트 한다고 왔다갔다 하더라고. 나는 개인적인것도 마을일도, 일단 해보는 편이야. 거기서 문제점이 있으면 보안하면 되니까. 근데 문제점이 너무 많은것 같아.(웃음) 마을 사업할때도  일단은 해보고. 거기서 보안하는 편이야.

- 폐가를 살리면, 마을 공동체에는 어떤 유익함들이 생길 것이라 생각하셨어요? 

마을이 너무 안알려졌으니까.. 한림사람 조차도 , 공무원 조차도 모른다고 해서, 한림3리를 알리자! 매스컴을 타자, 알리자 라는 입장에서 시작했어. 젊은 친구들이 오고 외부인들에게 많이 알려지면 직거래까지 할 수 있지 않나하는 기대가 있지. 마늘이나 깨 같은 것 말야. 폐가살리기 협동조합이 얼마나 커질지 모르지만, 그 라인이랑 협동해서 직거래를 할 수 있도록. 아 근데 어른들도 차츰 불만들이 쌓여가고 있어. 두달이 지나고 하고 있는데, 결과물이 보여지지 않으니까 말이지.(웃음) 주민들이 눈에 보이는 걸 제일 좋아해. 농부들은 손이 빠르니 일처리가 빠르잖아. 그런데 이 폐가 살리는 일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까지 겨우 저거해서..?라는 생각을 농민들은 할 수 밖에 없지. 우리는 하루에 양배추 모종 1000개를 심는 사람들이라 손이 굉장히 빠르고 일처리가 빨라. 하지만 지금 폐가 살리기는 좀 진행이 더딘것 같아. (옆 자리, 사모님과 제석:한림3리 폐가 매니저, 웃음)

- 폐가를 살려서 해보고 싶은 일, 이장님에게도 있으실텐데, 한 집을 고치면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싶으세요?

소득사업을 해야하지 않을까 해. 마을 재정이 바닥이야. 제로다 제로. 재정확충을 위한 방법을 좀 마련해보고 싶어. 마을의 이득을 위한 일들을 해보고 싶지. 개인적인것 보다는 말야. 지금 우리 추진 위원들이 이야기 하는게 소득사업이 뭔가 있어야한다는 것이거든.  





늦은 밤, 인터뷰는 짤막하게 끝났다. 농사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들었는데, 이 직업 참 겸손하고 정직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어 맘이 찡했다. 심은대로 거두고, 함께 농사한 사람들과 공정하게 가격을 측정한다. 농산물이 풍년이면 가격이 많이 떨어지는데, 모두가 잘 되면 모두가 나눠야 하니 그 몫이 적더라도 얼마나 공정한가. (그 공정함이 조금은 슬펐다. 이상하게도.) 날씨가 좋지 않으면(가뭄이나 태풍),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고 겸허히 눈 앞에 보여진 참사를 받아드리며 다시 땅을 성실히 일궈야하는 그 겸손함. 농사꾼의 마음은 이 날 밤, 아니 한림3리에 있는 내내 마음을 울렸다. 그 작은 공동체의 리더십인 이장님의 인터뷰는 또 한번 맘을 애틋하게 했다. 마을을 향한, 마을을 알려 마을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지금보다 덜 힘들게 농사를 지을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폐가 살리기! 한림3리와 협력해서 모두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다!